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수•당제국의 숙적으로 지내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담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은 618년 당이 건국된 지 딱 50년 만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신라에게 주기로 했던 당초의 조약과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는 물론 신라까지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고, 결국 신라와의 [[나당전쟁]]이 일어났으나 7년 간의 전쟁 끝에 평양 이남의 한반도 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요동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인 [[고왕|대조영]]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발해]]를 세우며 발해가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발해의 건국으로 실상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으로 얻은 영토를 거의 모두 잃은 개고생만 한 셈이 되었다(...)[* 그래도 [[요동]]은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제로에 가까웠고 그나마도 발해가 탈환해 버린다.][*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력을 소진한 당나라는 티베트, 돌궐 등에 대해 제때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거기다가 고구려가 통제하던 내몽골, 요서 등지의 유목민족들이 고삐가 풀려 날뛰게 되면서 헬게이트를 맞게 되었다. 애초에 고구려는 이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하던 국가였다. 농경 민족임과 동시에 강대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는 고구려는 이미 말갈, 거란, 돌궐과 교류하며 지냈고 발해 건국에서 알 수 있듯이 흑수말갈이나 속말말갈 정도를 제외하면 웬만한 말갈족은 고구려에 동화된 상태였다. 그런 국가가 내실까지 탄탄하니 수당제국은 그 많은 인구수와 인프라를 갈아넣어 국운을 건 총력전을 걸었고 왕조가 한 번 교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겨우겨우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토번을 통제하지 못 해 이후 당의 골칫거리가 됐으며 그렇다고 중화 제국이 동북아를 제대로 통제한 것도 아닌데다 한반도 세력까지 북쪽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거란, 몽골, 여진과 같은 유목민족들이 밀고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애시당초 당의 국력이 신라보다 훨씬 위임에도 토번을 신경 쓰느라 결국 신라에게 당초 약속한 대동강 이남 땅을 주어야 했던 것을 보면 고구려와의 전쟁이 당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을지 손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애초에 천하 통일을 목적으로 한 명분론적인 성격으로 일어난 전쟁인 만큼 전쟁의 당위성도 상당히 약했고[*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행할 당시 당나라 조정의 다수 대신들은 '무용론(無用論)', 즉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의지가 너무 강해 원정이 결정되었다. 물론 당시 당나라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적과의 동침|이웃으로 지내기에 몹시 위험한 이웃]]이기는 했다.] 돌궐, 토벌 전쟁처럼 경제적 이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니라서 투입 대비 산출이 너무 안좋은 전쟁이었다. 결국 당나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부은 결과 토번, 돌궐이 다시 발호하는 결과만 낳는 등 당나라 입장에서도 명백히 실패한 전쟁이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 굳이 의의를 찾자면, 궁극적으로 이곳의 영토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만주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은 사라졌다는 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주변 적대국들 중에서 영토도 상당하며[* 토번, 돌궐 등과 비교했을 때 작다고 서술되었었으나, 토번과 돌궐 등은 그냥 이름을 그렇게 통일해 부를 뿐 수많은 부족으로 갈라져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실제 영토도 고구려를 동•서 6,000리, 10,000리 등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주변국들은 고구려를 절대 영토가 작은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다. 또한 과거에는 인구수로 국력을 판단했고, 고구려는 농경을 근간으로 하여 주위의 유목제국 및 토번 등보다 인구가 더 많았으므로 중원의 통일 제국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구밀도를 비롯한 생산력 측면에서 유목 국가와 비교되지 않은 저력을 낼 수 있으면서도 말갈과 거란과 같은 유목민들을 통제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낼 수 있던게 고구려의 위치였다.] 통치 체계가 상당히 문명화된, 문화적 역량을 갖춘 나라였으며 농업을 근간으로하는 정주민족이기에 인구도 많은 편이었고 북방의 유목민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력도 강력한 나라였다. 고구려를 사전에 정복하지 않고서는 당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굉장히 위험하고 화근의 불씨를 키우는 일이었다.[* 당장 고구려와 발해가 망하고 초원과 만주를 차지한 요와 금은 중원세력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국가였다. 만약 신라와 같은 후방 동맹이 없고 고구려가 중원 전선에만 신경쓰면서 힘을 키웠다면 당에게 어떤 위험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돌궐 및 중화 제국들과 접경한 북서쪽 지역에 최정예 전력을 항상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들을 보면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하던 대륙 세력들이 침공하는 길목에 대부분의 방어 전력을 쏟아부은 흔적이 발견된다. 신라가 진흥왕 시기 함경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당시 신라의 국력이 급성장하기도 했고 고구려 내정이 엉망이기도 했지만, 그 시기 고구려가 돌궐과의 분쟁으로 인해 요동 지역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킨 것이 가장 컸다.[* 실제로 원산만 이북 지역은 진흥왕 이후에 곧바로 고구려에게 뺏기고 만다.] 그런데 당나라가 [[영류왕]]의 요청대로 화친하게 되고, 어느 정도 대당 조공-책봉 관계가 안정되게 되면, 이제 고구려는 온전히 한반도 지역에 정예 군사력을 투입시킬 수 있게 되며, 수도 평양과 가까운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후대에 다시 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특히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100년 넘게 점령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요동에 있는 병력을 이곳으로 투입하면 이곳의 토착 세력들이 자연스레 고구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았다. 중화 제국들과 달리 언어와 풍습도 비슷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지역의 지리와 토착 세력들의 인적 정보 및 인적 커넥션 보유 등 여러모로 이민족들이 침략하는 것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당시 신라와 백제가 거의 서로 멸망을 목표로 피터지게 싸우던 중이고 화해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이 굳건하던 6세기 초반 무렵보다 훨씬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즉, 고구려가 이전 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면 고구려와의 최전선에 투입된 [[신라#s-13|신라군]]들 후방에서 토착 세력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이었다. 그리고 백제 한성 함락에는 200여 년의 시대차가 있고 기습공격이긴 하지만 고작 3만 명밖에 동원되지 않았다.] 후대의 발해나 조선, 고려와는 달리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끊임없이 중원 왕조의 군현들을 침략하면서 성장한 나라다. 애초에 호전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기회만 난다면 얼마든지 조공-책봉 체계를 깨고 중국 변경을 괴롭힐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나라 이후 세워진 중국 한족의 통일 제국들([[북송|송]], [[명나라|명]])을 위협하고, 심지어 멸망시켰던 국가들(요[* 내몽고 - 요서 지역에서 발흥했지만, 이들이 가진 알짜배기 영토의 대부분은 요동과 만주였다.], [[금나라|금]], [[청나라|청]])은 대부분 고구려가 있었던 만주에서 발흥했다.[* 물론 [[몽골 제국]]은 세계 제국이니 논외] 물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명분은 17세기 초반 명나라의 후금 원정처럼 단순한 안보적 위협 제거가 아닌 '점령 통치'가 목표[*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감행할 당시에도 당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 '실지론(失地論)'을 내세우며 고토(한 4군) 회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실지론'이 고구려 정벌의 동기라는 견해가 최근에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이는 사료의 액면 그대로만을 받아들인 견해이고,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한 실질적 이유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라서 통일되지가 않는다. 어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간에 목표는 점령 통치였다는 것은 분명했다.]였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요나라]]가 발흥하기까지 중국 통일 왕조의 국가적 안보를 위협할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중국인들이 유독 만주를 자신들의 안보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산지가 많아 방어가 쉬우며, 중국 입장에서 정복을 위해선 엄청나게 긴 보급선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수십만에서 100만 이상 단위의 보급 병력들과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곳의 정복을 포기하자니 그것도 문제다. 이곳에 터를 잡은 국가들은 얼마든지 10만 이상 단위의 정예병들을 충분히 원정에 동원할 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럼 당장 외교적으로 냉각기에 들어가거나 중국이 조금이라도 삐끗한 모습을 보이면, 이 병력들이 그대로 하북 지방으로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하북 쪽이 점령당하면 중원 장악은 시간 문제다.] 따라서 고구려가 후방에 신라를 두고 국력을 집중시킬수 없을 때 사전에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이것까지 계산에 놓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당시 중원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 최대 안보의 위협은 흉노가 발호했던 몽골 평원 일대다.], 후대의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최소한 당나라가 송나라나 명나라처럼 이민족(금[* 문맥상 북송 멸망을 지칭하는 걸로 이해하길 바람], 원, 청)에 의해 멸망당하지는 않는 토대를 깔아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이후 장구한 세월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살펴본 결과론적인 의미이다. 명백히 말하면 '''당나라 입장에서 고구려 원정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원정'''이다. 보통 우리는 여기서는 668년 고구려 멸망에 주목하지만 이 전쟁은 '''666년 12월'''부터 시작된 전쟁이다. 즉 고구려는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기까지 '''무려 2년 가까이'''를 버틴 것이었다. 그리고 위에도 나와있듯이, 본국에서의 병력만 50여만명에 하북의 세금을 쏟아붓고, 신라와 협공하여 일으킨 전쟁인데도 요동에서 무려 1년 이상을 허비했다. '''연남생이 요동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통째로 바쳤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점은 멸망 직전의 절체절명인 상황인데도 고구려는 25만 명이라는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요충지가 무너진 이유는 당나라의 공격이 아닌 내부의 배신자들 때문이었다. 즉 어마어마한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당나라는 이 고구려 원정에 힘을 너무 쏟아버려서 서쪽의 토번이 커지는 걸 막지 못해 실크로드가 막힐 뻔했고[* 중국, 일본, 구미의 학자들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한반도 지배하지 못한 것을 토번 탓으로 돌리며 신라의 삼국통일은 신라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신라가 잘난 것이 아니며, 당나라가 신라에게 패배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사실 수나라부터 시작된 수십년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토번을 성장을 막지 못한 것이니 이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당태종이 힘써 밟아놓은 돌궐과 거란이 다시 부활해버렸다. 게다가 기껏 점령한 고구려 영토도 관리를 못해서 발해가 성립하는걸 막지 못했고, 요동 지방도 [[안록산의 난]] 이후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이 과연 만주의 안보에 기여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말갈이나 거란 같은 호전적인 유목민들을 확실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면 만주-한반도의 통합으로 인해 심각한 안보적 위협이 생기는 것도 맞지만, 중원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거란-여진과 달리 고구려는 건국이래 계속해서 한반도로 진입하고자 했던 국가이다.[* 고구려는 유목민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국가다. 예맥계 민족으로서 한국어를 쓰는 민족이었고 이는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천하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어쨌든 중화 민족과는 자신들을 구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를 정복한 광개토대왕 때부터 영토 확장보단 안정화를 꾀했으며 이러한 강대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다. 또한 언어적으로도 유목민족은 중화 민족과 더 가까우나 고구려는 한국어를 쓰는 한반도 민족이었기 때문에 굳이 중국에 쳐들어갈 이유나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중화 문화에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고구려 문화가 동화되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실제로 선비족이 어떻게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졌는지를 옆에서 똑똑히 본 나라다. 물론 역사에선 고구려가 멸망했기에 만약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고구려]]가 중원을 노릴 가능성이 어느정도 있었다. 물론 당나라가 전성기에서 벗어나 혼란해질때까지 고구려가 국력을 전성기급으로 유지한다는 가정하에만 성립한다. 있다는 측면에서는 건국 초기에 [[발해]]와 국력이 비슷했었던 [[금나라]]와 [[청나라]]는 한반도의 나라와 화친을 맺거나 제압한 뒤에[* [[금나라]]는 [[고려]]와 화친을 맺었고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항복시킨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력차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혼란스러웠던 중원을 삼켜버렸다. 당대 고구려와 국력이 비슷했었던 토번이 후에 발전해 당나라 혼란기 때 [[당나라]]를 침략해 수도 장안을 약탈해간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 역시 [[당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침략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당 입장에선 토번이 고구려보다도 더욱 경계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수도 장안이 토번이랑 매우 가깝기 때문. 실제로 토번은 당나라가 고당전쟁 후 피로해져있던 틈을 타 장안 부근까지 초토화시킨다.] 특히 고구려가 백제, 신라 등을 병합하고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는, 여기서 만족하자 보다는 이 물량이면 중국을 밀겠지? 라는 심산을 가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보는 편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삼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부터가 전성기에 백제로부터 마한땅을 빼앗은 이후 마한인을 자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고구려가 가진 정체성은 부여에서 파생된 부여의 별종이라는 인식 정도였고, 고구려가 건국됬을 때 삼한지역은 인접국조차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 있고 중원인이라는 정체성은 없으니 침략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시조로 섬기는 단군조차 평양 산신령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인의 시조 지위까지 획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인식은 유동적이다. 광개토대왕이 요하 동쪽까지 진출한건 고구려의 국력이 거기까지였던 것에 불과하며, 말년에 축성과 내치에 집중한 것도 알렉산더의 예에서 보듯이 자국의 소화력을 넘어서는 정복활동은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영토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역량을 넘어서는 영토에 욕심내지 않고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던 것은 고구려가 자신들의 역량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일 뿐이다. 고구려는 요하라는 자연국경+천연장벽을 현실적으로 이용했을 뿐 그들이 가진 천하관이 허락하는 영토가 거기까지여서 그랬던 것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의 폭발적인 정복활동은 중원에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열리며 변방 이민족에 대한 통제력은 물론 내부질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정복활동이 둔화되는 시기가 중원이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며 안정화되던 시기와 겹치는게 과연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장수왕 때 북연 황제인 풍홍을 북위에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했던 것과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서에서 보여준 알력다툼 등 고구려는 요서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는데, 고구려인들이 제한적인 천하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전성기 때 왜(일본)를 침공하지 않은 이유가 고구려의 천하관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것이 왜를 침공하려면 당연히 백제, 신라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바다를 통해 왜를 침공하는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고구려는 전성기가 끝날때까지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는데 어찌 왜를 침공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왜를 침공하려면 바다라는 천연방벽을 뚫어야한다. 일본열도가 한반도지역보다 국력이 앞서는 시대가 고려 중후기 즈음이고, 5세기의 왜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닌 규슈와 칸사이 일대만을 차지하고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고 해도 당시의 왜는 백제부흥운동 당시 수만명의 지원군을 보낼 정도의 역량은 있었다. 그런 나라를 바다 건너 정복하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투사하며 정복상태를 유지한다?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이민족들을 상당수 제압한 후 거의 마지막 선택지로 고구려 원정을 선택했던 것처럼, 고구려도 직접지배할 영토를 전부 점령하고 땅으로 이어진 위협국들을 전부 제압한 후 거의 마지막으로 할만한 선택이 바로 일본원정이다. 고구려는 왜를 정복할만한 상황에 놓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상황에 놓였던 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정해진 영역 이상을 나가지 않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구려가 왜를 치기 위한 선결작업을 무시한 주장이다. 고구려가 중원을 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고구려는 고구려 독자문명체제를 구축한 정체성이 분명했다는 점이다. 중원처럼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오만한 사상의 개념에서의 획일화 천하개념과 정체성에 의한 확장을 요하는게 아니라 다원적 천하개념을 가진 고구려만의 정체성이 분명했다. 즉 고구려라는 중심에서의 천하세계의 확장한계선이 분명했다는 소리다. 이는 그러한 기본적인 정체성이 없던 [[금나라]]나 [[청나라]] 및 [[요나라]]같은 형태의 그저 약탈 및 국력 한계 극복차원의 확장과 다름을 의미한다. 예시로 언급된 세 나라를 세운 종족들은 대부분 한족에게 동화되어서 스스로의 정체성마저도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에도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그들이 시행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게다가 그들이 화북으로 오지 않았을때도 한족과 본인들간의 이질적 형태의 거리감이 분명했다. 반면 고구려는 오히려 역으로 한족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하여 이질적 형태를 최소화해갔거나 없애갔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다민족 국가 그것도 이민국가임에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쳐있는 것과 같은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이정기]]의 [[제나라#s-7|제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장기간의 대학살을 통해서 정체성을 철저하게 짓밞아서 고구려 문화적 성향을 다시 중화적 문화로 돌려놨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문화만큼의 강력한 독자적인 정체성 문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며 나중에 이러한 문제는 [[금나라]]의 [[발해]]인 탄압에서도 재확인이 가능하다. 이런 정체성은 문화적 의식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어도 확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인들 스스로가 난하-대흥안령산맥 부근을 근방으로 이미 서부와 서북방에 대한 천하관 확장 한계선을 분명히 한 것이 대표적인 이유인 것이며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듯이 왜(倭)라는 당시 일본을 자신들과 전혀 다른 천하관 혹은 세계관으로 인식했던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성기때 노려볼 수 있었던 일본 열도도 외부라는 이유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어도 다원세계를 인정하며 독자적인 문명의 정체성을 갖춘 국가로서 정해진 영역 이상을 나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걸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통일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의 3분의 1이 고구려계이고 말갈계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고구려계임을 감안하면 군사적인 유산은 고구려가 많이 물려줬을 가능성이 크다. 지방군도 최대 3정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삭주와 한주, 명주는 고구려의 영토이거나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던 곳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